김강은 작가는 자연이라는 ‘화실’에서 그때그때 영감을 길어 올린다. 산꼭대기에서 바라본 웅장한 경관부터 숲길에서 만난 아늑한 풍광까지, 그 자리에서 그 즉시 작품으로 탄생시킨다. ‘하이킹 아티스트’라는 길을 스스로 낸 지 6년째. 오래 좋아하고 깊이 바라보는 것이, 창작자로서 스토리텔링을 잘하는 그만의 비결이다.
화가, 여행작가, 유튜버. 자유롭게 매체를 넘나들며 자기답게 미래로 나아간다.
정상에 이르기까지 그는 절대 서두르지 않는다. 찬찬히 올라갈수록, 꼼꼼히 바라볼수록, 소소한 아름다움들을 제대로 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산에 오르다 마음에 드는 풍경을 만나면 그는 가던 길을 잠시 멈춰 그림을 그린다. 몸이 힘들 때도 마찬가지다. 잠깐 머물며 숨을 고르다 보면, 예상치 못한 명장면이 시야로 불쑥 들어오곤 한다. 느림과 멈춤과 쉼. 그의 영감은 그 틈을 타고 수시로 온다.
그는 국내 1호 ‘하이킹 아티스트’다. 산을 오르면서 인상 깊은 풍경들을 그림으로 그리고, 산에서 내려와 길 위에서의 느낌이나 생각들을 글로 쓴다. 그림으로도 글로도 표현하지 못한 이야기들은 유튜브에 담는다. 브이로그에 가까운 좌충우돌 경험담이 많아, 구독자들을 수시로 웃게 만든다.
산에서 그림을 그리는 일은 몇몇 ‘제약’과 함께 하는 일이다. 무거운 도구를 다 챙겨갈 수도 없고, 오랜 시간 쭉 그림을 그릴 수도 없다. 하지만 그 제약에서 그는 해방감을 느낀다. 작은 도화지나 물통이 필요 없는 물붓, 미니팔레트 같은 최소한의 화구야말로 그림을 더 자주 그리게 만드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화구가 간소해진 대신 관찰력이 크게 향상됐다. 좋아하는 대상을 자세히 바라보는 일. 단지 그 일을 시작했을 뿐인데,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그는 ‘성공한 미술인’을 일찌감치 꿈꿨다. 홍익대 미대에 입학하면서 그 길에 들어선 듯했지만, 졸업이 다가올수록 도리어 그 꿈과 멀어졌다. 하고 싶은 일과 먹고 살 방법 사이에서 방황이 시작된 것이다. 시간을 벌기 위해 휴학을 하고, 토익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던 어느 날이었다. 막막함과 답답함을 달래기 위해 집 앞의 수락산엘 무작정 갔다. 머릿속 걱정거리들은 이내 까맣게 지워지고, 눈앞의 풍경만 그새 말갛게 들어왔다.
그때부터 툭하면 산엘 올랐다. 엔지니어협회 콜센터에서 6개월간 일할 때도, ‘열정에 기름 붓기’라는 스타트업 기업에서 1년 반 동안 근무할 때도, 주말만 되면 산행을 이어갔다. 이후 한동안 벽화가로 활동했다. 산에 오를 수 있는 시간이 늘면서, 지친 몸도 다친 마음도 거짓말처럼 회복됐다.
‘휴식처’였던 산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건 2017년부터다. ‘하이킹 아티스트’라는 닉네임으로 그간의 산행기록을 SNS에 올렸는데, 어느 날 누군가 ‘하이킹 아티스트’가 무얼 하는 직업이냐고 물어왔다. 순간 머리가 띵했다. 닉네임으로만 존재하던 직업을 실천에 옮겨야겠다 마음먹었다.
잘하거나 좋아하는 일을 끝까지 즐기려면 ‘완벽하게’ 해내려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고 그는 생각한다. 출발점에선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 돋보이지만, 결국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나가는 사람이 ’잘하는 사람‘이 된다고 믿게 됐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힘을 좀 뺄 필요가 있다. 자신의 부족함을 받아들이면서 어떻게든 조금씩 이어나가는 것, 실처럼 가늘고 먼지처럼 하찮은 작업이라도 끝끝내 포기하지 않는 것. 그것이 진짜 재능이라고 산이 가르쳐줬다.
‘바깥’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이후 그에게는 또 하나의 직업이 새롭게 열렸다. 다름 아닌 여행작가다. 길 위의 풍경들을 화폭에 담기 시작한 뒤로, 그 길 위의 느낌들을 자연스레 글로 쓰게 된 것이다.
자기만의 진로를 찾았지만 삶은 여전히 불안투성이였던 2018년, 서른 살을 코앞에 둔 그는 17년 지기 친구와 함께 산티아고 순례길(프랑스길)에 올랐다. 인생의 물음표가 아닌 ‘느낌표’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 길 위의 기록은 이듬해인 2019년 <아홉수, 까미노>라는 여행책으로 세상에 나왔다. 그림 같은 풍경과 웃음 나는 일화들이, 길 위에서 나눈 우정과 길 위에서 퍼 올린 생각들이, 그 길을 함께 걷는 듯한 착각을 독자들에게 선사한다. 순례에 필요한 ‘꿀팁’들은 유쾌한 만화로 담아냈다. 따뜻한 산문집이자 유용한 ‘정보서’인 셈이다. 그 책이 출간된 뒤 글을 쓰는 삶이 시작됐다. 아직 책으로 묶이진 않았지만, 산에서 보고 느끼고 배운 것들을 신문(한겨레 ESC ’김강은의 산, 네게 반했어‘)과 잡지(월간 산 ’DO IT NOW’) 등에 꾸준히 연재하고 있다. 그림과 글이라는 양 날개로 자기만의 소우주를 그는 오늘도 신나게 비행 중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유망직업은 자기만의 이야기를 쌓아가는 사람들의 것인지 모른다. 남들의 길을 기껏 따라갔는데, 그 길이 사라져버리는 일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김강은 작가는 바로 그 스토리텔러들의 맨 앞에 있는 인물이다. 한 대상을 오래 좋아하고 깊이 관찰하면서, 누가 뭐라든 끝까지 그 일을 해나가는 것. 좋은 직업은 그 길 위에 존재한다. 그의 환한 미소가 그 사실을 증명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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